머리말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지난 5월 하순 <로터스 버드 Lotus Bud>가 공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몇 유수 언론의 기자들이 문의를 해왔다. 엉겁결에 누구에겐가 그 자료를 ‘한 두어 해 전’에 입수했노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 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본의 아닌’ 거짓말은 계속되었고, 그렇게 기사에도 나갔다. 그러나 이 자료는 필자가 미국에 체류하던 98년에 입수한 것이다. 입수 시점으로부터 5년여를 끌어오다 공개하게 되었다. 나는 왜 5년을 2년으로 줄여 말한 것일까. 새 자료에 목 말라하는 국내 학계의 현실에서 5년은 긴 세월이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아마도 ‘게으름의 질타에 대한 자기방어본능’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이 자리에서 문화·학술분야의 뛰어난 저널리스트 유석재 기자(조선일보)와 신준봉 기자(중앙일보),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필자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UCLA의 몇몇 교수들과 한인 2세·3세 문인들을 만나 이민문학 연구를 위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전문의 헨리 김Henry Kim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 스테파니 한Stephanie Han이다. 당시 그녀는 배우이자 시인으로서 대학원 과정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하던 재원이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1세대 이민으로 하와이에 건너왔던 외할머니로부터 자신에게 이어진 이민사의 생생한 역정을 들을 수 있었고,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귀한 자료 <로터스 버드>의 사본까지 입수하게 되었다. 한동안 흥분에 들떠 불면의 밤들을 지새운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최근 그것을 공개하기까지는 몇 가지 확인할 사실들이 있었다. 스테파니에 의하면 그것은 그녀의 할머니가 보관해오던 유일한 대본이었다. 즉 사본이면서 원본인 셈이었다. 그러나 표지와 중간, 마지막 부분 등 여러 장이 날아가 버린, 불완전한 원본이었다. 그래서 원본을 찾아야 했다. 어딘가에 그 원본이 보관되어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탐색을 시도했다. 미국 대학 도서관들의 사이트를 세밀히 검색하기도 하고 수시로 유수대학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연락도 해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급기야 미흡한 모습으로 공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로터스 버드>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수출품이라는 점이 그 하나이고, 한인들이 이민지의 문화와 만나 이룩한 결실이라는 점이 또 하나의 의미다. 그간 우리는 문학이론 뿐 아니라 창작 분야에서도 일방적 수입국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창작 분야의 수입은 각종 장르의 ‘번안’으로 구체화되었고, 개화기나 근대문학 초창기에 활발했다. 이처럼 주로 일본을 통해 서구의 문학을 들여오기 바쁘던 그 시기에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이민으로 떠났던 한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큰일을 해냈다. 이민 30년 만에 이룬 땀의 결실이었다. 현지에서 어엿한 지식인으로 성장한 자녀들을 통해 그들은 조국의 문화를 그곳에 심고자 했다. 그들은 일제의 압박으로 소멸되어가던 조국의 전통과 문화를 새로운 모습으로 미국 땅에 되살리려 한 것이다. <춘향전>, <홍길동전> 등 우리의 고대 서사문학들을 무대에 올린 것도 당시 그곳의 한인들이 외국에 대한 ‘문화 사절’의 역할을 자임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와이 대학교 패링턴 극장의 맥퀘스튼McQueston 같은 미국인 후원자들의 도움도 컸을 것이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처럼 <로터스 버드>는 한인 2세들과 미국인들이 합작으로 만든 ‘우리 고소설의 영문 번안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로터스 버드>를 우리 문학사상 첫 수출의 물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급속히 미국 화하는 자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던 이민 1세대의 근심과 배려가 숨어있다는 점에서 이런 작품의 제작과 공연이 ‘미주 한인 이민사’의 문화적 사건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국문학사의 한 사건으로도 기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외국의 문학을 수입하여 번안한 것들만 언급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문학으로서 외국에 수출·번안된 작품도 있음을 거론할 수 있게 된 점이야말로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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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교정에 참여해준 박형철·박병배·양영아 등 제군과 마이클Michael Souza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들의 손질에 힘써주신 이성훈 선생 , 소장하고 있는 <홍길동전>과 <심청전>의 사진을 몸소 찍어 보내주신 이현조 박사와 정일선 선생 등은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이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도서출판 월인의 박성복 사장과 최형필 상무는 몇 해 전 필자의 '해방 전 재미한인 이민문학'(1~6)에 이어 이 번의 책도 솔선 출간해주셨다. 필자의 연구영역 확대에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시는 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 소중한 인연을 오래도록 지켜 나가고 싶다. 글을 읽고 비판해주신 박일용 교수, 유려한 필치로 <로터스 버드>를 소개해주신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와 중앙일보 신준봉 기자의 후의는 잊을 수 없다. 많이 읽히고 토론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2004. 10. 20.

가을이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숭실동산 백규서옥에서

백규 드림